출처: 블록미디어
물냉면에는 드라이 리슬링, 비빔에는 로제 스파클링 어울려
평안도 출신 시인 백석이 예찬했던 음식, 냉면. 날이 더워지면서 벌써부터 시내 유명한 냉면집에는 냉면 마니아들로 북적인다. 냉면은 유명한 가게에서는 한 그릇에 1만5000원이나 하는 고가다. 하지만 가격과 상관없이 사람들은 마술에 걸린 듯 매년 여름철이면 냉면을 영접하기 위해 긴 줄을 마다하지 않는다. 가격이나 중독성이나 냉면은 가히 ‘면의 제왕’으로 부를 만하다.
특히 평양냉면은 그 슴슴한 맛으로 매니아층을 양산해 왔다. 조선의 왕인 순조, 고종도 즐겼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냉면은 오래전부터 호사가들의 음식이었다. 고관대작들은 태어나서 한번도 밟아보지 못했을 산높은 북관의 음식인데다 차게 먹는 국수라는 의외성이 조선시대 점잖은 양반들에게도 ‘힙하다’는 평가를 받았던 것이다.
평양냉면을 먹을 때 ‘선주후면’이라는 말이 있다. 먼저 수육이나 제육과 함께 소주를 마시다 냉면으로 입가심을 하는 것이다. 메밀로 만든 평양냉면은 차가운 음식이어서 취기로 생긴 열을 내려주는 효과가 있다.
여름철 사람들을 줄 세우는 평양냉면은 와인과도 잘 어울린다. (사진=연합뉴스)
술과 잘 어울린다는 냉면은 그렇다면 와인과도 잘 어울릴까? 결론부터 말하면, 냉면 가운데 물냉면은 차갑게 조리되기 때문에 차가운 화이트 와인과 잘 어울린다. 평양냉면 육수가 슴슴한 맛을 추구하기 때문에 와인도 드라이하며 약간의 산미가 있는 와인이 좋다. 그래서 드라이한 리슬링이 평양냉면과는 제격이다. 독일의 드라이 리슬링은 투명한 레몬 컬러인데 사과, 복숭아, 배의 향이 난다. 호주나 오스트리아 리슬링은 당도가 적어 시트러스나 레몬향이 강하다.
드라이 리슬링은 대체로 한식과 궁합이 좋은데 냉면도 예외가 아니다(드라이 리슬링은 산미와 단맛의 조화 덕분에 김치나 잡채같은 한식과도 어울린다). 특히 드라이 리슬링은 주로 단맛에 의해 결정되는 독일의 리슬링 가운데 비교적 저렴한 편이어서 와인에 초보인 ‘와린이’도 도전해 볼만하다(독일 리슬링은 수확시기가 늦을 수록 당도가 높아지고 가격이 비싸진다. 서리가 내린 뒤 당도 높은 리슬링으로 만드는 아이스 와인이 대표적이다.).
게다가 드라이 리슬링은 ‘골동면’으로 불리던 비빔냉면에도 잘 어울린다. 리슬링이 가지고 있는 산도 탓이다. 리슬링은 포도 품종 가운데 가장 서늘한 지역에서 자라는 품종이다. 낮에는 덥고 밤에는 서늘한 큰 기온차는 리슬링의 산도를 깊게 한다. 단 맛이 나는 리슬링도 비빔냉면에는 괜찮다. 비빔장에 주요한 맛인 단맛과의 매칭이 좋기 때문이다.
냉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와인 페어링에는 두가지 방향이 있다. 하나는 정반대의 성향을 이용하는 것이다. 비빔냉면의 매운 맛과 리슬링의 단맛을 대비시키는 것이다. 나머지 하나의 방향은 비슷한 성분끼리 밀어주는 것이다. 스위트 리슬링의 단맛이 비빔장의 단맛을 기분좋게 만드는 것이다. 슴슴한 냉면 국물과 상쾌한 드라이 리슬링이 어울리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리슬링을 제외한다면, 입안을 가장 명쾌하게 정리해주는 와인은 로제 스파클링이다. 로제 스파클링은 원래 디저트를 먹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맛과 향이 좋아서 일반 스파클링 와인처럼 음식과 먹어도 매칭이 좋다. 막장을 찍어먹는 한국식 회와도 어울릴 정도로 한식과 잘 맞는다. 청주나 막걸리와 비슷한 효능감이 있다. 하지만 입안의 모든 잔맛을 앗아간다는 단점도 있다. 입맛이 섬세한 사람에게는 오히려 아쉬운 포인트일 수도 있다.
조금 더 도전적인 페어링을 즐기고 싶다면 비빔냉면에 호주 쉬라즈를 권한다. 호주 쉬라즈의 경쾌한 향신료 향이 비빔장에 들어있는 매운 양념과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호주 쉬라즈는 비싼 것은 수십만원을 호가하지만 편의점에서 1만원대 가격으로도 구입이 가능하다. 가격이 싼 호주 쉬라즈로 충분히 도전할만 하다. 호주 쉬라즈는 비빔냉면뿐 아니라 불닭볶음면처럼 매운 면요리와도 잘 어울린다. 하지만 호주 쉬라즈는 물냉면에는 권하지 않는다.
* 권은중 전문기자는 <한겨레> <문화일보> 기자로 20여 년 일하다 50세에 이탈리아 북부 피에몬테의 ‘외국인을 위한 이탈리아 요리학교(ICIF)’에 유학을 다녀왔다. 귀국 후 <경향신문>, <연합뉴스> 등에 음식과 와인 칼럼을 써왔고, 관련 강연을 해왔다. 『와인은 참치 마요』, 『파스타에서 이탈리아를 맛보다』 등의 저서가 있다.